김기홍, 크리스천이라면 꼭 알아야 할 이야기 교회사
비평
김기홍 교수의 「이야기 교회사」를 읽으면서 기존의 역사책과는 다르다고 느꼈다. 일단 많이 팔렸다. 개정판이 나온 것이 2010년인데 2016년 현재 벌써 9쇄까지 찍어냈으니 지겹다고 평가를 받는 역사에 관한 책 치고는 대단히 많이 팔린 것이다. 읽어보니 그 인기의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일단 굉장히 쉽게 풀어썼다. 책의 서문에도 밝혔지만, 저자는 교회사를 쉽게 볼 수 있도록 저작했다.
먼저 눈을 사로잡는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소제목이었다. 고대 교회부터 바로 역사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교회사가 무엇이 특별한 것인지 잘 짚어준다. 교회사의 특징이라면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라는 것이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쓰인 역사는 그저 인간 중심의 사건들을 살펴볼 뿐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사를 통해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하신 일들을 살펴보려 한다. 평범한 역사는 모두 지난 일 뿐이니 허망하고 의미가 없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마감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눈에는 역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새신자라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처음부터 잘 알려주고 가는 것이 감명 깊다.
이 책의 특징 중 하나라면 각 사건의 연대별 구분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전체적인 흐름은 고대 교회에서 시작해 중세교회를 거쳐 종교개혁으로 들어가지만, 세세한 파트와 장들은 시간의 흐름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고대교회 파트에서 이게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은 12-14장이다. 12장에서는 삼위일체 논쟁을 설명하며 니케아 공회를 중심으로 한 300년대 경의 역사를 다루고, 13장에서는 수도원에 대해 다루는데 연도가 제법 중복되기도 하고, 수도원의 기원은 3세기 초부터 나온다. 14장은 3세기를 뛰어넘어 이미 4세기를 뛰어넘어 5세기에서 시작하니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연대별 구분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중세에서 보면 더하다. 19장까지만 해도 봉건제를 설명하며 샤를마뉴의 시대에 머물러 있었는데, 20장부터는 12세기로 시간이 갑자기 뛴다. 21장은 대학을 설명하는데, 대학의 출현은 십자군 전쟁 이후부터인데, 이 책에서는 5파트나 가야지 십자군 이야기가 나온다. 23장에서는 교황제를 설명하며 고대교회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연대가 아니라는 걸 잘 알 수 있다.
오히려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각각의 시기에 교회를 대표하는 운동과 인물, 혹은 사건이다. 왕, 황제, 제국과 왕국을 중심으로 쓰이는 일반 역사와는 달리 교회사는 교회를 중심으로 다룬다. 그러다 보니 “초대교회의 예배”라던가 “카타콤의 교회”, “초대교회의 이단”, “사도의 전통” “삼위일체, 그리스도 논쟁” 등과 같이 주제를 중심으로 한 챕터들이 굉장히 많다. 중세로 넘어오면서도 고대 교회사보다는 빈도수가 줄기는 하지만, “중세의 대학”, “거지 수도사”, “문예부흥” 등 딱히 연대를 따르지는 않고 오히려 그 시기의 대표적인 키워드들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왜 굳이 이렇게 하는지는 서문을 통해서 짐작 할 수 있다,
“역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여주신 자연계시 중에 단연 으뜸이다. 세상적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 속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을 볼 수 있다.”
저자가 밝히는 대로 그리스도인은 교회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초대교회에는 다양한 이단이 있었는데, 이단의 도전은 교회에 대한 상당한 위협이 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해나가고 정경화를 서두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반면에 교회에서는 신앙의 정경화를 서두르게 되었다. 그때까지의 신약성경은 한 권으로 편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책들로 따로따로 나뉘어 있었다...중략...이들로부터 바른 성경, 즉 정경을 선정하기 위해서 그리고 말시온에 대항해 복음의 여러 면을 보여 주는 사도들의 글을 모두 포함시키기 위해서 정경화의 작업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삼위일체 논쟁에서도 마찬가지로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다양한 신앙인들이 이상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의해보려 하는 노력들이 이단을 낳게 되는 결과도 있긴 했다. 그러나 역사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보자면 결국에는 삼위일체교리가 니케아 공회를 통해 정립되어 “한 주 예수 그리스도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을 믿나이다….” 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가 이 책을 읽기 쉽게 저작했다는 증거 중 하나는 어려운 외국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럽과 지중해를 무대로 하는 교회사의 특성상, 사람의 이름은 물론이고 각종 지명, 사건명 등 모두 유럽의 언어들일 텐데, 이 책은 그런 외국어를 거의 쓰지 않았다. 가톨릭교회의 라틴어 성경인 “Vulgate”를 설명할 때 “벌게이트”라고 한다. 13세기말에 프랑스의 백년전쟁 즈음에 프랑스 왕이 교황의 칙령을 무시하고 교황을 비난한 것에 대한 보니파키우스 8세의 대답을 “Uam Sanctum”이라고 하는데 쉽게 “우남상탐”이라고 했다. 이름을 무조건 한글로 풀어쓰면 그 이름의 기원을 모를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만, 벌게이트를 설명할 때는 이름의 유래를 확실히 풀어써줬고, 우남상탐은 애초에 우남상탐을 설명하려는 목적보다는 교황과 국왕 사이의 갈등을 알려주고자 한 장치이기에 큰 문제는 없다.
쉽다는 점을 또 느낄 수 있는 부분은 각종 이단에 대한 설명을 읽을 때였다. 저자는 영지주의를 설명하며 단순히 그것이 무엇인가 설명하기 보다는 먼저 영지주의자들이 가졌던 의문부터 시작한다. 헬라 철학과 동방 종교로부터 비롯된 영지주의자들의 “어떻게 선하신 하나님이 악한 물질과 관련을 맺을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부터 설명한 뒤에, 영지주의의 논지를 “알 수 없는 아버지” 혹은 “지혜” 와 같이 쉬운 이름을 사용하며 영지주의의 신들에 대해 설명한다. 그 후에 왜 정통 기독교가 영지주의를 배척했는지 알려주기도 한다.
이러한 쉬운 설명은 말시온주의를 설명할 때도 마찬가지고, 몬타누스주의도 마찬가지다. 몬타누스주의를 설명할 때는 몬타누스주의가가 말시온주의나 영지주의와는 다르게 정상적인 하나의 하나님을 주장함에도 왜 몬타누스의 운동이 교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알려준다. “성령으로 인해서 자유함을 얻는 것보다는 성령으로 인해서 오히려 억압받게 된 것이다,” 라는 설명으로 쉽게 몬타누스주의의 문제점을 알게 해준다. 이후에도 몬타누스주의의 영향으로 의문을 품게 된 신자들에 대해 설명하며 그 악영향을 쉽게 설명해줬다.
교회사를 배울 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 부분이 시대가 변화하는 과정이다.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사는 고대교회사, 중세교회사라는 큰 갈래로 나뉘는데, 고대교회사부터 중세교회사로 완전히 변화되기 가기까지는 대단히 긴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저자는 고대교회사부터 중세교회사로 변해가는 과정을 쉽게 접근한다. 유럽이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것은 로마의 멸망부터인데, 저자는 “로마제국의 멸망”부터 “중세 봉건사회의 발흥”까지 이 변화의 시기를 자세히 살펴본다. 로마의 멸망은 다소 갑작스러울 수 있으나, 저자는 왜 로마가 게르만 족과 같은 민족에게5세기경에는 쉽게 함락되었는지를 인구의 감소, 사회의 생산적인 구성원의 감소, 중앙집권통치 속에 무능한 황제들의 등극 등을 예시로 들어가며 충분히 납득 시킨다.
저자는 로마의 멸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종합해 볼 때 도덕과 질서의 타락이 로마를 병들게 하여 거대한 제국을 쓰러지게 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로마제국 역사 전체를 보면 부도덕은 언제나 끊임없이 있었지만, 말기에는 더욱더 한심한 지경이었다. 특별히 정부기관의 타락과 잔인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극심했다. 위에서부터의 타락은 제국민 전체를 물들였다. 잘 발달된 문화와 뛰어난 문명도 그것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타락하는 데는 어쩔 수 없었다.
중세가 종료되는 시점에서도 비슷한 설명이 이어진다. 차이점이 있다면 고대교회 때에는 로마제국의 멸망이 곧 고대교회의 종료의 시점이었지만, 중세교회는 특정 국가의 멸망보다는 사회 체제의 변동에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중세 때 봉건제도에서 국왕과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민족국가의 출현과 같은 사회 체제의 변동도 로마의 멸망과 마찬가지로 훌륭하게 짚어준다.
저자가 고대 교회와 중세교회를 설명 할 때의 공통적인 특징은 교회의 타락을 경계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중세교회에 대한 설명을 살피다 보면 교회의 타락을 조명하는 것을 단편적으로 4차 십자군 전쟁에 대한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십자군은 더 이상 교회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았다.”
중세교회의 타락은 십자군 전쟁 때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은 분명한 사실인데, 저자는 그런 면을 서서히 등장시킨다. 216쪽부터 225쪽 사이의 “교권과 세속 권력의 갈등”에서 ‘교황제의 발달’ 부분이 단편적인 예시이다. 저자가 교회의 타락을 말할 때 강조하는 부분은 세속 권력과의 융합인데, 이러한 면은 역시나 고대 교회에서도 나온다:
로마 사회가 타락해 있을 때 기독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황제가 교인인 것이 기독교의 외형상으로는 엄청난 도움을 주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오히려 손실을 주었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상류층을 차지하고 로마 정부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외형적으로 믿는 이들에 의해 채워졌다. 성직자가 정부로부터 봉급을 받고 큰 특권을 누리는 것이 외형적으로 기독교에 유리해 보였지만 실제적으로는 많은 고위 성직이 권모술수와 위선에 능한 이들로 채워지는 결과를 빚었다.
고대교회에 대한 이런 설명은 저자가 중세교회나 고대교회 가릴 것 없이 일관되게 교회와 권력의 결탁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세교회의 타락에 대한 단편적인 면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드러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은 당시 분위기의 일부요 대표적인 것들이다. 교황청은 하나의 거대한 독재 권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절대 권력은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대단히 부패해 있었다. 그러기에 개혁의 소리들을 수용할 처지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저자의 이런 일관성은 교회사가 보여주는 암울한 면에 대한 반성을 일깨워준다.
고대교회의 부패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면 자연스럽게 저자는 개혁적인 사상을 중요시한다. 수도원 운동, 카타콤의 교회, 거지 수도사, 개혁의 물결 등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설명이 저자가 부패와 반대되는 것을 추구하는 경향을 중요시한다는 걸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수도원의 활동들은 비록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국가와 타협하여 세속화된 유럽의 교회에는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중략…이들은 사회에 영향을 주었고 교회를 변형시켰으며 복음을 전했고 거룩한 삶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저자도 신앙생활의 이상을 고행과 연결시킨 수도원의 폐단을 알고는 있으나, 사실 그다지 깊게 다루지는 않는다. 카타콤의 교회에 대해 다룰 때는 그들이 겪은 박해에 대해 안타까워하기만 할 뿐 오로지 칭찬일색이다. 저자가 순수한 사상에 긍정적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십자군 원정에 대한 설명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십자군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였다…중략…그러나 대부분의 군사들이 신앙적인 헌신 때문에 십자군에 참가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첫 번째 십자군만은 그러했다.
다른 십자군 원정에 대한 설명은 모두 부정적이고, 그다지 좋지 않지만, 첫 번째 십자군과 마지막 십자군을 이끌었던 경건한 루이 9세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새 시대는 멀지 않았다. 개혁의 물결은 점점 높아만 가고 있었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중요시 여기는 것은 서문과 1장에서도 나오듯이, 하나님의 주권과 뜻이다. 2장씩이나 할애한 십자군 원정의 끝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서방은 더 이상 원정할 의욕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만약 하나님께서 십자군을 원하신다면 왜 루이를 돕지 않았던가? 루이까지 도움을 받지 못한 다면 그 누가 도움을 받을 것인가? 다른 지도자들은 죄악에 빠져 있었고 욕심에 가득 차 있었다.그러나 루이는 성자였다. 그렇다면 성지의 탈환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을 해서 승리하는 자가 어디 있을 것인가?
십자군 원정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잘 설명한 대목이다. 많은 중세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데, 어찌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겠는가? 반면에 초대교회 때의 이단의 어려움을 견뎌낸 교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교회가 이단들과 싸우고 박해 속에 단합을 이루게 했다…중략…내우외한 속에서도 교회는 망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련을 통해 하나님은 신자들을 훈련시켰고, 교회는 다시 진리의 기준을 확고히 하여 끊임없이 성장하게 되었다.
이처럼 저자가 시대적 교회에 대해서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판단의 근거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부정적이라기보다는 다소 불편한 면이 있다면 중간에 빼먹은 역사의 파편들이 많다는 것이다. 고대교회사에서도 1세기경부터 시작해서 초대교회의 예배부터 시작해 사도의 전통까지 모두 주제별로 설명하고, 그리스도 논쟁까지도 대부분 주제별 설명을 하다가 15장에 갑자기 이르러서 로마의 멸망에 대해 다룬다. 교회사니 사실 세속사를 그리 자세히 다룰 필요는 없지만, 어느 교부가 생존할 당시에는 어느 황제가 다스리던 시기이다, 정도의 설명은 덧붙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중세교회 파트에서도 마찬가지로 샤를마뉴와 민족국가의 수립 사이에 언급되는 왕이나 국왕은 모두 십자군 전쟁이나 교황청과 관계가 있던 왕들뿐이다. 그 와중에도 어느 나라 왕인지 빼먹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부족한 것이 있다면 유럽 각지의 선교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다. 중세에 거의 모든 유럽이 기독교화 된 것에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텐데, 590년경에 교황 그레고리에 의해 보내진 어거스틴에 대한 얘기를 제외하면 “어느 족속이 이렇게 해서 개종했다더라.” 정도의 설명뿐이다. 로마에 비하면 게르만 민족이 다소 미개한 문화를 가진 것은 맞지만, 그들이 개종한 것을 단순히 기독교를 로마 문명의 일부로 보고, 문명에 대한 동경심 정도로 자세한 설명 없이 치부하는 것은 꺼림칙하다. 충분한 설명과 함께 한다면 납득할만한 논지이긴 하다.
결론
이 책은 앞에서 설명한바 같이 쉽게 쓰인 역사책이다. 저자의 의도도 명확하고, 표현된 문장들도 그 목적에 알맞은 수준이다. 신학을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새로이 공부를 시작하는 신학도에게 전체적인 맥락을 잡아주는데 매우 유용하다.
다만 새신자에게도 무조건 도움이 되는지는 의문이 된다. 완전히 새신자라면 이 책을 혼자서 읽기보다는 교회사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과 함께 읽거나 다른 서적과 함께 독서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새신자라면 십자군과 같이 교회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해할 수 있다.
십자군 원정은 사회에 영향을 그다지 주지 못하는 교회가 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십자군처럼 죄악에 찌든 사건들이 교회가 중심에 있어도, 그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기도 한다는 것을 명확히 알려줘야 할 것이다.
로마의 멸망과 함께하는 고대 교회의 끝자락을 보며 한국교회를 그 가운데 투영하게 되었다. 초대교회는 박해의 중심 속에서 성장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시작 할 때부터 유대인들로부터 활발하게 박해 당했고,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는 로마제국 전체에서 박해를 했다.
저자가 설명하는 것처럼 카타콤의 교회는 그러한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그리스도인들의 눈물 나는 역사의 유물이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로 그런 박해의 시기를 견딜 때가 있었다. 조선말기와 일제 강점기를 지나며 교회는 많은 박해를 견뎌야 했다. 양반과 하층민의 계급 사이에 있는 분쟁도 거치고 신사참배를 견디며 살아남아 왔다. 물론 굴복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교회는 살아남았다. 시간이 흘러 교회는 한국의 경제발전과 함께 부흥했다. 70-80년대의 한국교회의 부흥을 영광의 시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고대 교회가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과 함께 세속 권력과 결탁하여 형식적으로 되고 타락하는 과정과 흡사해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닌 것 같다. 70-80년대의 교회의 부흥 속에서 교회가 눈치 채지 못한 교회의 실수는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를 들어서면서 그 부작용들이 강력하게 드러났다. 어쩌면 교회는 로마제국 멸망의 때에 로마의 부패와 타락을 막지 못했던 것처럼, 현대에 와서도 나라의 부패를 막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교회를 세우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으신다. 세워가는 사람들은 변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뜻을 이 땅에 펼치실 것이다. 로마제국을 위한 교회는 없어졌지만, 교회는 하층민들을 위한 도미니칸과 프란시스칸 수도사와 같은 이들에 의해 다시 재등장하기도 한다. 제롬은 로마가 부패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탄식했지만, 자기 자신은 소신껏 주님의 뜻을 따라 벌게이트를 완성하기도 했다. 개개인의 사람은 약하기 그지없지만,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한다면 켄트의 어거스틴과 같이 역사의 한 쪽을 장식할 수 있을 것이다.
2016년 10월 10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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