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가를 찾아봐도 운동 DNA가 없는 내가 유일하게 관심있게 보는 스포츠는 NBA다. 대학 다니던 시절 스포츠 광이던 미국친구의 영향으로 나도 덩달아 NBA를 즐겨보게 됐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엄연히 매니아층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뉴스도 많이 챙겨보게 되었고 경기도 자주 봤다. 최근 1년 새에 약간 시들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유일하게 챙겨보는 스포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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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한국을 방문한 NBA 선수 중에는 스티븐 아담스라는 선수가 있었다. 스티븐 아담스는 NBA를 주기적으로 챙겨보는 팬정도 되어야 알 수 있는 선수이고, 스타는 커녕 평범한(?) 주전급 선수다. 아담스는 2018년 여름 관광차 한국을 방문했는데, 엄연히 오프시즌 임에도 기초훈련을 하고자 했기에 우리나라 KBL의 서울 삼성 썬더스 훈련 시설에서 훈련을 가졌다. 당시 훈련시설에서 찍힌 아담스가 한국 선수들과 1대1을 하는 영상이 국내 농구 커뮤니티와 언론 매체에 공개 되었는데 꽤 많은 사람들이 훈련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NBA 경기에서는 센터로서 궂은 일만 맡아서 하는 아담스의 평소 모습에서 전혀 상상치 못했던 화려한 스킬로 한국 선수들을 농락했기 때문이다.
영상을 보고 적잖게 충격을 받은 국내 팬들은 한국 농구의 수준에 대해서 한숨을 짓기도 했다. 이후에 적잖게 많은 분석글과 한탄글이 커뮤니티에 올라왔는데, 국내 농구의 사정을 전혀 몰랐던 나는 오히려 아담스의 방문을 계기로 한국 선수들의 문제점을 알게 되었다. 어떤 팬들은 영상을 보고 한국의 가드들이 미국 NBA의 센터보다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냐고 분석하기도 했다. KBL과 NBA의 기본기 차이는 몸풀기 영상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NBA 선수들은 포지션을 막론하고 안 들어가는 슛을 찾기가 어려운 방면 KBL 선수들은 꽤 많은 슛이 빗나간다. KBL의 많은 팬들은 선수 한명에게 집중하기보다 KBL과 국내 농구의 전체적인 현실을 건설적으로 비판했다. 어떤 팬들은 국내 농구계의 답답한 현실이 결국 선수들의 기본기 부족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나는 국내 농구의 사정은 전혀 모르지만 침례교계의 현실도 이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난 2월 침신대 졸업식에 참석한 이후 신대원 생활을 돌아봤을 때 한국 농구선수들이 기본기가 부족하듯이 한국의 신학생들 역시 기본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농구의 기본기를 슛과 드리블이라고 한다면 신학생의 가장 중요한 기본기 중 하나는 성서원어능력이 아닐까 싶다. 성서신학 뿐만이 아니라 교회사, 조직신학, 종교철학, 실천신학 등, 모든 신학전공이 결국 성서를 기본적인 텍스트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학부시절 경험상 미국의 신학대학원생들은 대체로 성서원어능력이 출중한 편이다. 특히 M.div 수준에서도 사전없이 헬라어 히브리어를 자유롭게 읽는 친구들이 종종 있다. 대학원에서 배운 것만을 토대로 성서원어를 사용하여 설교를 준비하는 친구들이 꽤 많다. 한국의 다른 신학교들을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침례신학교 만큼은 성서원어가 등한시 되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왜 원어를 어렵게 배워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학생들도 제법 많았다. 몇몇 교수님들은 원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열띄게 강의를 준비하시지만 많은 학생들은 알파벳과 초반 3-4단원 수준의 헬라어 1, 히브리어 1에서 낙마하였다. 비단 내가 신학교에 다닌 2019-2021년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가 헬라어 가르치시던 2000년대 중반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 아버지는 헬라어 수업 중간, 기말 시험지를 집으로 가져오셔서 체점하시곤 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적잖게 많은 시험지에 빨간색 비가 피처럼 흘러내렸고 어떤 시험지는 백지에 가까웠다. 그때에도 성서원어를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들이 꽤 되었는데 15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비슷한 분위기가 이어져오고 있던 것이다. 이를 통해 나는 신대원생 개개인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예 침례교 신학교육의 전체적인 분위기에도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게 됐다. 1학년 쯤의 나는 원어를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들을 보고 속으로 손가락질을 했으나 나도 사역을 1년 정도 해보고 나서부터는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조심히 관찰하면서 왜 학생들이 성서원어를 등한시 하는지, 왜 기본기가 떨어지게 되는지 고민해봤다.
먼저 신대원 3년 동안 만난 대부분의 학생들은 사역지에서 써먹을 수 있는 실제적인 교육을 원했다. 당장 금요철야부터 주일예배까지 일주일 중 3일이나 투자해야 하는 파트타임 사역의 현실 속에서 신학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에서라도 사역에 도움되는 지혜를 얻고 싶어 했다. 학생들이 공부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사역에 대한 열정과 성도들을 향한 사랑만큼은 가지고 있었다. 공부는 약간 뒤쳐지더라도 무엇보다 사역만큼은 열심히 하는 착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두번째로 학생들에게 시간이 없었다. 일주일 중 금토일이 사역에 투자된다면 주로 화수목은 신대원 수업을 듣는 시간이었다. 이 시간 동안 대부분의 신대원생들이 아침 9시부터 최소 오후 4-6시까지는 수업을 꽉꽉 채워서 들었다. 그러고나면 주중 저녁이나 월요일에 과제를 해야 했다. 한가지 함정은 많은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업이 없는 시간과 월요일, 혹은 평일 저녁이 모두 아르바이트에 투자되고 있었는데, 이는 대부분 학비 때문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면 지치는 몸을 이끌고 집에 와서 과제와 공부는 자연스레 포기하게 되었다.
이 두가지 문제점이 겹치게 되면서 학생들이 가장 어려운 편에 속하는 성서원어를 과감히 내려놓는 것이다. 물론 졸업은 해야하니 많은 학생들이 최소 학점이 될만큼만 공부하고 성서원어를 내려놨다. 성서원어를 배우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수업시간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개인공부와 과제에 투자해야 하고, 하루라도 놓치고가면 금새 까먹는 것이 언어다. 하지만 신대원 시절에 배워놓지 않으면 졸업 이후에는 배우기 더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많은 신대원생들이 재학중에도 성서원어를 배울 시간과 자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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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이 기본기가 부족하게 되면 그 위에 새로운 신학을 쌓아올리는 일은 더 어려워 진다. 실제로 신학대학원의 많은 학생들이 새로운 신학 교육에 마음이 닫혀있었다. 특히 현대신학 수업 시간에 불트만에 대해 배우면서 이 문제점을 체감하게 됐다. 19세기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중요한 신학자들을 다루는 수업이었는데 학생이 책을 통해서 해당 신학자의 입장을 숙지해오면 교수와 함께 질문을 나누며 수강생 전체가 대화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스타일이 나랑 잘 맞아서 당시 교수님 수업을 꽤 좋아했는데, 불트만 순서 때 학생들이 대단히 혼란스러워 했다. 특히 비신화화라는 말을 듣고 많은 학생들이 혼란스러워 했는데, 그 중 압권은 불트만은 그리스도인이 아닌거 같다는 말이었다. 불트만의 관점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을 하기도 전에 자신이 가진 근본주의 신앙과 다른듯하니 그저 비신앙인이라고 치부했다. 교단 신학교라는 곳은 어찌보면 그 교단에서 가장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학생들을 모아 놓은 곳이나 다름없는데 우리 신학교가 이정도 밖에 안 되었나 상당히 아프게 다가왔다. 문제는 이러한 태도를 가진 학생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입장과 다른 신학을 이해하는 단계부터 거부감을 느껴서 나중에는 아예 읽지 않으려 했다.
한국침례교 신학교육의 문제점을 정리하자면 두가지가 있다. 1) 학생들의 기본기가 부족하고, 2) 다양한 신학을 거부한다. 학생들이 단순히 불성실한 것은 개인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기가 부족하고 다양한 신학을 듣고 이해하고 소화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 침례교의 신앙교육과 신학교육 자체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미국의 신학계는 이미 고등비평이나 역사비평을 넘어서 세속대학들의 종교학자들과 전통적인 신학교 소속의 신학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논의가 발생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북미, 유럽의 학계가 지나치게 서로를 적대시해서 양질의 대화가 부족하다고하지만 한국신학생이 보기에는 배부른 소리다. 대화가 적대적이면 아무렴 어떤가? 논의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다양한 학문적인 고민과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의 신학생들은 여전히 고등비평과 역사비평이 무엇인지, 그게 왜 필요했고 왜 발생했는지 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미국 남침례교단과 복음주의권 신학교들은 세속학자들에게 욕을 많이 먹는 편이다. 지나치게 편향된 교육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한국신학생인 내가 보기에는 배부른 소리다. 복음주의권 신학생들이 편향된 교육을 받고 있기는 해도 꽤 수준 높은 교육을 받는다. 세속대학들의 학문적 수준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미국의 많은 교단신학교들은 성서원어 교육을 강조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학자라도 읽어보고 비평하는 문화가 있다. 그 비평 자체가 편향적일 수 있지만 비평을 해보는 것과 아예 하지 않는 것은 다른 문제다.
기본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애초에 다양한 신학적 관점을 읽어보고 비평할 능력을 기를 수 없다. 또한 다양한 신학적 관점을 읽어보고 비평하는 분위기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논의조차 발생하지 않는다.
한명의 교수, 한명의 신학생은 뛰어난 사람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침례교 신학계 자체의 분위기가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전체적인 수준은 나아지지 않는다. 저번에 유학관련 글을 올린 후에 종종 나에게 유학에 대한 조언을 구하려는 연락이 오는 걸 보아서는 여전히 깊은 공부를 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꽤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우리들이 가진 신학적 기초와 깊이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 침례교에게 필요한 것은 개천의 용이 아니라 개천을 다양한 생명이 살아숨쉬는 강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명의 개천의 용보다 건강한 장어 수준은 되는 목회자들과 신학생이 여럿 있어야 침례교계가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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