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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및 소개/📕성서학 책 리뷰

마르크 반 드 미에룹, 고대 근동 역사를 읽고(2): 1천년기와 아시리아

by 성서학 대학원생 2022. 12. 27.

고대 근동 역사를 읽고(1): 3천년기, 2천년기

고대 근동 역사를 읽고(2): 1천년기와 아시리아

 

며칠 전 3천년기와 2천년기를 살펴보았는데, 이제 기독교인들에게 더 익숙한 1천년기로 넘어가보려 한다. 1천년의 시작은 불행하게도 잘 나가던 청동기 시대가 붕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 청동기 붕괴 
기원전 12세기경 흔히 말하는 "청동기 시대의 붕괴"가 일어나게 된다. 잘 발전하는 듯한 문명들이 갑자기 폭력적인 양상으로 변하게 되며 해상 민족이 침입하고 수세기 동안 파괴가 일어나며 암흑기로 접어들게 된다. 논쟁이 분분하지만 청동기 시대의 붕괴는 한번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당시 영토 국가라는 공동 시스템으로 묶여있던 고대 근동 사회가 무엇인가 한두가지 삐걱거리기 시작하여 결국 전체가 무너진 것이다. 문제는 사료가 부족하다. 문헌이 많았던 2천년기는 붕괴를 맞이하고 한동안 사료의 숫자가 감소하게 된다. 이 시기에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알파벳 문자가 발전하게 되었고 아마 초기 히브리어와 아람어가 이 시기에 발전했을 것이다. 

📌 1천년기 
청동기 붕괴 이후에는 우리가 아는 아시리아 제국이 등장한다. 나는 이 시기의 역사를 배우며 내가 스스로 아시리아 제국을 굉장히 업신여겼음을 알게 됐다. 사실 기원전에 존재했던 제국에 대해서 내가 업신 여길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만은...아무래도 성경을 통해 아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내 인식이 고정된듯 하다. 내 인식 속에서 아시리아 제국은 힘만 센 전쟁광의 이미지가 있고 바벨론과 페르시아가 훨씬 세련된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 3개의 제국 중에서 사실상 아시리아만 몇세기 이상 제국이자 강대국의 역할을 다했고 나머지 국가들은 길게 존재하지 않았다. 또 이 시기에는 언급된 3개의 제국 외에도 페니키아인들, 우랄투와 엘람과 같은 강대국도 존속했다. 

📌 1천년기와 아시리아 제국의 태동
아시리아는 전쟁을 많이하기는 했다. 그들은 군대적 사회였고 왕이 곧 잘 원정을 주도했다. 다음은 아시리아의 몇가지 특징 
1) 피라미드 모양의 관료체계와 위계질서를 가졌다.
2) 상비군을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한 나라
3) 총력전보다 수시로 여러나라와 전쟁했다.
4) 전리품을 취하면서 조공을 걷어가는 형식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해졌다. 
5) 정복하면 사람들을 이주시켜 새로운 지역을 만들곤 했는데 성서에 나오는 사마리아가 이러한 정책의 한 예시로 볼 수 있다.  
6) 제국이기 때문에 사료가 풍부하다. 특히 전쟁과 건축에 대해서. 전쟁기록이 많다보니 전쟁광이라는 오해를 받는듯도 하다.  
7) 영토확장은 수시로 이루어졌지만 학계에서는 보통 티글랏-필레셀3세와 사르곤2세를 기준으로 지도를 만드는듯 하다.
8) 살만에셀 3세에 대항하는 연합군이 있었는데 이 중에는 북이스라엘도 포함 된다. 
9) 아시리아는 본국 영토와 본인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앗수르의 멍에 아래 있는 땅"을 구분했다. 
10) 제국의 사이즈 유지를 위해 총독 같은 관료제가 유행했다. 왕의 권력에 따라서 총독이나 장군들의 자유도가 증가하기도 하고 때로 왕이 죽게 되면 권력다툼이 심했다. 
11) 9세기경 제국에 위기가 찾아와 새로운 제국 시스템을 만들어야 했다. 

📌 아시리아의 세계 정복 
1) 9세기와 8세기경 아시리아는 원정능력을 상실하고 제국은 무너져 가고 있었다. 
2) 총독들은 사실상 형식적으로 충성 맹세했다. 
3) 티글랏-필레셀 3세부터 다시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그는 군대를 정비하고 상비군제도를 도입한다. 
4) 이때부터 아시리아는 조공을 바치게 하지 않고 정복한 땅을 아예 궤멸시키곤 했다.
5) 기존에 속국은 단순히 조공을 바치는 수준이었지만 이제 3단계로 바뀌었다. 첫째: 조공을 바치는 단계, 둘째: 토착인을 꼭두각시로 세운 괴뢰국, 셋째: 아시리아 파견 총독을 통해 통치하는 합병 단계. 성서의 북이스라엘은 이러한 과정을 잘 보여준다. 
6) 아시리아는 무제한 정복을 꿈꾼 것이 아니었다. 페니키아나 이집트와 같은 곳은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중간 국가들을 정복하지 않은채로 정면 충돌을 피했다. 즉 아시리아의 속국 정책은 제국의 자원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지 전쟁광들이 아니었다. 
7) 아시리아는 바벨론을 완전히 합병하려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8) 앗수르바니팔에 도서관을 설치한것이 재조명되면서 문화적인 발전이 주목받게 되었다. 5000점의 문학과 과학 문서들이 있고 왕들은 계속해서 도서관을 온전히 보존하고 문헌들을 계속해서 들여왔다. 

바벨론과 페르시아는 다음주에!